
시나몬
오션스8
루리나인
뜨거운 물방울이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뉴욕에선 귀여운 스케일의 범법자일 뿐인 줄리는, 한없이 가벼운 옷차림을 한 채 그들의 아지트를 살랑대며 가로지르는 중이다. 젖은 머리칼과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피부에는 제 것이 아닌 연기 냄새가 배어있고, 발걸음은 머리 위에 접시라도 얹은 듯 조심스럽다. 타인이 그녀를 떠올리면 색색의 구슬들이 잘그락거리며 부딪히는 것처럼 경쾌하게 웃는 모습이 제일 먼저 생각날 정도로 쾌활한 줄리인데도, 지금은 어쩐지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숨을 죽이고 뒤꿈치를 든 채 걷는다. 지은 죄가 있거나, 들키기 싫은 짓을 하고 돌아왔음이 분명하다.
“줄리.”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줄리의 걸음을 붙든다. 입 모양만으로 조용히 불건전한 말을 내뱉은 줄리가 방긋 웃으며 뒤를 돌아본다. 루가 외출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로 소파에서 일어선다. 줄리의 화장기 없는 얼굴 가운데 살짝 부은 입술에 루의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오, 안 자고 있었네요!”
“잘 시간은 아니지. 일어날 시간이면 몰라.”
두꺼운 암막 커튼 너머로 뉴욕의 새들이 쓰레기통 위에서 짹짹대는 소리가 들어온다. 그건 보통 사람들 이야기다. 직업상 활동하는 시간이 늦을 터인 루는 클럽을 관리하고 들어와 지금 즈음이면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다. 같은 침대를 쓰는 줄리가 잘못 알고 있을 리 없으니, 줄리의 입을 막기 위해 던진 말이다. 줄리는 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기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아무 데도 안 다녀왔어요.”
눈썹을 까딱이며 루가 팔짱을 껴 보였다. 이런 문답을 십수 번은 한 줄리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계속 집 안에 있었고, 구석에서 책을 읽다 깜빡 잠들었어요. 지금 자러 들어갈 생각이었는 걸.”
“줄리…. 자고 있었다니.”
루가 팔짱을 풀고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아차, 줄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제가 이런 모습인 것을 잊고 있었다. 욕조 속에서 책을 읽었을 리도 없고. 차라리 반신욕을 하다 잠들었다고 해야 했나, 후회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줄리는 어깨를 으쓱이고 웃음으로 대답을 넘겼다. 어차피 제 대답은 루에게 중요하지 않다. 딴짓을 하면서 조금 놀다가, 루가 잠들 시간 즈음 침대로 기어들어 갈 생각이었다. 애초에 내 방을 따로 주었으면 좋았잖아? 제가 배당금을 도박으로 날려 먹은 것은 잘못이지만, 첫 만남 때 줄리가 부품을 빼먹다 걸렸던 그 오토바이 외에도 번지르르한 새 애마를 장만한 루가 아직도 치사하게 굴면서 빚을 갚으라고 잡아두는 것도 나쁘다. 애초에 도둑놈들끼리 그게 무슨 ….
“어딜 다녀왔다고?”
루의 목소리가 주절주절 이어지던 줄리의 마음속 목소리를 잘랐다.
“진짜 아무 데도 안 나갔어요.”
“나가지는 않았겠지. 매번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말하게 만들지 마.”
“제게도 ‘사생활’이라는 소중한 영역이….”
“줄리. 누구와 있었어?”
질문이 달라졌다. 줄리가 밖에 나가지 않았다는 건 벌써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아지트랬다. 그들의 아지트 취급을 받는 이 공간의 주인은 엄밀히 말해 루가 맞지만, 각자의 개인 공간은 (줄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존중받고 있었다. 루가 그녀를 찾아보기로 했다면, 줄리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개인 공간에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리라.
줄리는 도통 루의 본심을 알 수가 없어서 괜히 심통이 났다. 루는 줄리가 놀고 들어올 때마다 가끔 이렇게 알 수 없는 질문을 하곤 했다. 그 빈도는 점점 잦아지고 있었고, 묻고 싶은 만큼 묻다가, 대답을 듣지 않고 휑하니 가버리곤 며칠이고 그녀를 피했다. 오늘도 가닥 없는 질문을 던지다 줄리가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고 있으면 듣지도 않고 어디로 가버릴 것이다. 저번 주엔 데비에게 구시렁대며 욕을 했더니 굉장히 흥미로워하며 데리고 놀아주었기에 기분이 풀렸는데, 이번에도 그랬다간 침대 시트에 감자칩 한 봉지를 다 쏟아버릴 테다.
“이봐, 무슨 일이야.”
“나인볼.”
불만스레 루를 노려보던 줄리의 뒤에서 툭 던지는 듯한 인사가 건너왔다. 줄리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곤 옆으로 살짝 비켜서는 것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가는 길 중앙에 갇히는 꼴을 피했다.
“시끄럽잖아. 다들 자고 있다고. 집주인이래도, 응?”
루와 줄리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음에도 나인볼은 괜한 구박을 던지고 들고 있던 맥주병을 앞뒤로 흔들며 부러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루는 줄리와 한 선문답이 피곤하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좀 전의 기싸움만 없었더라면 슬금슬금 다가가 가슴에 키스했을 정도로 섹시한 모습이라, 줄리는 화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 화가 가라앉다 못해 기분이 좋아져서 빨리 루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고 싶었다. 실없이 웃음을 흘리는 모습을 두 사람이 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줄리는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루, 먼저 들어갈 테니 빨리 와요. 나인볼, 잘 자요!”
이 자리엔 저 말 속에 담긴 의미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었다. 손까지 팔랑거리며 침실로 향하는 줄리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 쾌활했다. 늘 이런 식이라, 로즈가 줄리의 머릿속엔 그렇고 그런 것밖에 들어있지 않냐며 고개를 가로저은 적도 있었다. 가끔 루의 눈치를 볼 뿐 남들 앞에서도 언동을 조심하는 법이 없고, 내숭떨거나 숨기거나 마다하는 법도 없다. 아무리 젊다고 해도 그렇지, 그 짓을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그러나 한 순간, 날듯이 자리를 뜨던 줄리를 나인볼이 불러 세웠다.
“침대가 차가우면 다시 내 방으로 와.”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뜯어다 내동댕이치는 것과 같은 발언이 세 사람 사이에 떨어졌다. 줄리는 얼음 바가지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걷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작은 웃음소리, 발걸음 소리에 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루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애인도 안 해주면서 취미생활까지 단속하는 침대 주인에게 뭐라고 애교를 떨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