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베링
나루토
사쿠아카
히노 아카리는 눈을 떴다.
바깥에서 지저귀는 새의 울음소리가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아카리 혼자 사는 집은 차가운 바람의 냄새가 났다. 밤새 내린 비에 젖어 눅진 거리는 공기에 잔뜩 숨이 막힌 이불과 베개를 정리하고 주방 쪽으로 향했다. 별생각 없이 식빵 한쪽을 꺼내 입을 문 아카리가 오늘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출근하기 전 유토 집에 들러서 과일 가져다 주기, 히무라한테 들러서 어제 빌려준 수리검 돌려받기, 9시까지 시간 엄수하여 출근할 것, 정식 출근임을 잊지 말기, 정식 출근…… 정식!? 아카리가 가디건을 걸치다 눈을 크게 떴다. 달력을 확인하니 6월 30일, 틀림없이 그녀의 정식 출근날이 맞다.
“…말도 안 돼.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토스트를 다 먹은 아카리가 하얀 머그잔에 우유를 따라 마셨다. 의료닌자가 되기로 하고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어연 4달, 드디어 그녀도 공식적으로 의료닌자의 직함을 부여받을 수 있는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달력에 그렇게 빼곡히 기록해 놨는데 기억을 하나도 못 하다니. 나도 참. 아카리의 눈썹이 아래로 부드러이 휘었다.
무채색의 하루가, 오늘도 시작되었다.
“어, 아카리. 오늘도 출근이냐?”
“응, 그렇지 뭐. 수리검은 잘 썼어?”
“덕분에.”
히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깨끗이 씻은 수리검을 건넸다. 어제 막 임무에 다녀온 터라 핏자국이 잔뜩 묻어있던 수리검은 밤새 그가 박박 닦은 덕분에 이젠 윤기까지 났다. 아카리가 미동 없이 서 있다 문득 웃었다.
“안 닦아도 되는데, 수고했어.”
“뭐? 그게 무슨….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지.”
히무라가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카리에겐 4달 전부터, 그러니까 그녀가 병원에 출근하기로 한 직전부터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세상의 색이 빛을 잃어가고, 눈을 아무리 깜빡여도 세상에 색이 입혀지지 않은 채 그녀의 눈에 담기는, 그런 끔찍한 비극. 아카리는 그것을 무채색의 향연이라 표현했다.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사람에겐 그래도 살 만 하다며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가는 그녀였다. 히무라 역시 그런 아카리를 잘 알았다. 하여 더욱 작금의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여하튼… 잘 썼어. 출근 잘 하고.”
“응, 너는 오늘…”
“난 오늘 하루만 휴가.”
“그래, 잘 있어.”
히무라가 힘겹게 말을 꺼낸 것에 비해 정작 당사자는 무덤덤했다. 아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뒤로 돌리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의해 휘날렸다. 그 먹물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아카리에겐 아무 색도 입혀지지 않은 도화지와 다름없다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오묘해졌다. 젠장. 히무라가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쾅 닫았다.
아카리가 길을 걸었다. 웃는 사람들이 보인다. 색은 보이지 않는다.
또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해가 가득 하늘을 채운다. 해의 빛이 눈을 찌른다. 해의 빛은 보이는데, 어째서 해가 담고 있는 색깔은 보이지 않는 걸까?
아카리는 문득 하늘에 묻고 싶었다. 너는 네가 보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느냐고. 거리를 걷는 아이, 가게 문을 여는 노인, 담배에 불을 붙이는 청년.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무채색의 나. 돌아오는 것은 색이 보이지 않는 하얀 하늘 위에 덮인 뭉실거리는 구름이겠지. 가슴이 아파져 왔다. 병원 문을 연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카리가 문을 열자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여럿 들려왔다. 최근 급증한 환자들 탓에 밤새 일을 한 인력들도 여럿 보였다. 신입인 자신이 빠져서인 안 될 터였다. 서둘러 의사 가운을 걸쳐 입은 아카리가 선배의 지시에 따라 응급실로 향했다.
“히노, 거기 D-23 환자 체크 좀 부탁해!”
“네.”
D-23… 아,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메이 에이타카요? 네, 알겠습니다. 증상은…… 네, 일단 가벼운 수술 정도는 받으셔야 할 거예요. 괜찮으신가요? 네, 알겠습니다.
아카리가 차트에 환자의 증상을 대략 기록하며 말을 이었다. 보호자 분, 원무과는 2층이고요. 임무 중 상해는 좀 더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씀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네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선배, 지난 달 의료 차트 기록 어디 있는지 아세요? D 구역이요.”
“그거라면 이미 창고에 넣어서 보관 중일 텐데, 왜?”
“이번에 들어온 환자분이 같은 구역에서 다치셔서, 어떻게 관련 처리 좀 못 하나 싶어서요.”
“되긴 될 텐데… 저기 저 안쪽 있지. 한 번 가 봐. 창고 어딨는 줄은 알지?”
“네, 감사합니다.”
아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가 가리킨 안쪽으로 향했다. 이미 기간이 지난 의료 차트는 모두 창고나 구석진 곳으로 몰아넣기 일쑤였다.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환자가 원한다면 이 일 역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해야겠지. 이런 시덥잖은 일에 불평하기엔 너무 깊숙이 와 버렸다. 이 일을 마다할 정도면 의료닌자가 되겠다 선언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카리는 여전히 그 날을 기억한다. 제 실수로 다친 동료, 터져 나오던 울음, 그리고 그 사람의 따뜻한 위로. 얼굴은 아직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때의 따스하면서도 형형색색의 색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던 세상, 그리고 두근거림에 벅차올라 어쩔 줄 모르던 자신. 아직까지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의 얼굴.
그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금 여기까지 와 버린 게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터져 나왔다. 그 사이 아카리는 헌신짝처럼 버려져 있는 의료 차트를 찾아냈다. 구석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니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한참을 구부러져 있던 허리는 원망스럽게 통증을 토해 내기 일쑤였다.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
세상에.
아카리가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려 있던 의료 차르를 툭 떨어뜨렸다. 탕, 하는 소리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 아카리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이가 떨어지는 차트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제 앞에 서 있는 이의 분홍빛 머리칼이 가벼이 휘날렸다.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네? 네……."
"다행이네. 조심해요."
의료 차트를 주워들고 아카리의 손에 쥐여준 그 사람은 초록빛 눈동자를 순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때의 색이 얼마나 따스하고 아름다웠는지. 아니, 색이란 것이 이런 감정을 품을 수 있었던가? 4달만의 세상이 재빠르게 물들고 있었다. 아카리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제 앞에 있는 풍경을 크게 둘러보았다. 흰 색깔로 물들여진 벽, 맞은편에서 하늘색 옷을 입은 채 놀고 있는 아이, 피로 물든 가운을 걸친 채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선배들.
아카리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
세상이 다시 쓰이게 되었다.
그 순간, 자신과 손이 맞닿은 그 따스한 이가 왜 다시 생각나는지 아카리는 알지 못했다.
*
"선배."
"응?"
"혹시 이 병원에…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있어요?"
"분홍색? 있는데. 그건 왜?"
"아, 그게……"
드물게 아카리가 우물쭈물 입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 보이자 호기심이 동했는지, 앞에 서 있던 선배는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뭐야, 관심 있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후후, 농담이야. 뭐… 분홍색이라면 딱 한 명 있긴 하지."
"한 명이요?"
아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찾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하루노 사쿠라."
"……어?"
"그래, 너도 아는 사람이지?"
선배가 웃으며 아카리의 어깨를 두어 번 톡톡 치고 지나간다. 수고해. 선배의 격려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카리는 그저, 멍하니 흰 벽을 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이제 색이 보인다. 명백히 희고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벽이 보인다. 모두 분홍빛의 따스한 그녀를 보고 벌어진 일이다. 아카리는 무언가 기이한 연결고리가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밤마다 그녀의 눈을 아리게 만든 무언가의 퍼즐이 풀린 것만 같은 기분, 그제서야 아카리는 눈을 감았다.
하루노 사쿠라, 당신이구나.
5대 호카게, 센쥬 츠나데를 직접 찾아가 당돌한 부탁으로 제자가 되어 엘리트 코스를 척척 밟아왔다는 사실은 이미 마을 내에 파다한 소문이니 제치자. 아카리 역시 하루노 사쿠라의 소문을 익히 들은 지 오래였다. 차라리 이번 만남이 처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카리의 머릿속에 하루노 사쿠라와의 첫 만남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처음 닌자란 의미를 굳건하게 세워주는 서클렛을 끼고, 팀을 이뤄 임무를 나갔을 적 아카리는 담당 상급 닌자에게서 중요한 한마디를 들었다. '동료란 마음을 합치고, 서로 지켜주는 존재다. 굳건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사이라고나 할까.' 지금으로선 부끄러운 소리지만, 당시 아카리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걸까? 각자의 몫만 다하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임무에 집중했다. 동료를 지킨다 하여도 가벼운 방어만 해 주는 게 전부, 나머지는 모두 적을 공격하는 것에 치중했다. 결론적으로, 동료는 히노 아카리에게 그저 두 번째 순위였던 게다.
그러던 중, 하루노 사쿠라를 만났다.
C랭크 임무에서 우연히 위험한 적을 마주하고, 한순간의 판단으로 같은 반 동료가 부상당했다. 담당 상닌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쳤으나 순간적인 판단 탓에 동료가 위험에 끼쳤다는 사실은 아카리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다. 병문안을 가려 발걸음을 움직였을 때에도, 동료에게 줄 꽃을 사는 중에도, 아카리의 머리는 복잡하기만 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건 심하게 다친 동료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분홍 머리의 여성. 지금과 같은, 따스한 기운이 만연한 하나의 봄.
- 네가 아카리지?
자신의 이름을 익숙하게 부르며 예의 그 새싹을 가득 담은 푸른 눈동자를 휘어 보이던 사람.
-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우리가 있잖아.
- 우리…… 요?
- 그래, 여기 나뭇잎 마을엔 실력 좋은 의료 닌자가 가득하다고!
왜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다. 모든 게 멈춰져 있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게 된 순간, 아카리는 하나의 운명을 느낀 게다.
그래, 그때의 그 사람이다.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주며 위로를 속삭이던 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세상에 길을 열어준 이. 왜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을까, 왜 나만의 봄을 가슴에 품기만 하고 찾지 못했을까. 이리도 가까이 있었는데. 이리도 맞닿은 사람이었는데. 아카리는 문득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소매로 대충 눈가를 문지르니 흰 가운이 축축히 젖었다. 그래, 이제 알겠어. 아카리가 미소 지었다. 당신은 날 언제나 살게 했다. 움직일 수도 없었던 멈춘 공간에서 숨쉬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 사람.
그리고 지금, 엇비슷한 상황이 도래한 순간이 왔다. 히노 아카리는 이제 참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기로 했다. 멈춰있던 하나의 세상을 움직여준 이, 무채색의 공간을 형형색색의 빛깔로 물들여준 이, 세상 누구보다 봄의 향기에 취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의연한 이. 이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어. 내가 당신을 똑바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하루노 사쿠라, 나는 당신을 따를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라 명명해도 좋다.
아카리가 마침내 환히 웃어보였다. 가슴 아리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꽃이 드디어 그녀의 마음에 맺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