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soruen
언더테일
머펫프시
00.
머펫이 당신을 초대한다면 핑계를 대서 거절해라.
01,
우연과 운명은 사실 별 다른 차이점이 없다. 우연히 육체를 가지게 되어 전혀 인연이 없던 이와 함께 살고 있는 프시케는, 가끔 자신이야 말로 운명과 우연이 하나라는 걸 증명하는 증거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육신이란 귀찮은 것이다. 필사적으로 육체를 원했던 햅스타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는 왜 그가 그리도 간절하게 실체가 있는 몸을 원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편하기만 한데. 이런 건.’
제가 가지게 된, 아니 떠맡게 된 육신은 도무지 장점을 찾을 수 없는 짐짝 같았다. 찢어진 날개는 움직일 때 마다 간지러운 소리를 내고, 다리가 떨어져 나간 자리는 찬바람이 불 때 마다 욱신거리며 아팠다. 멀쩡한 육체여도 번거롭다고 느꼈을 텐데, 이렇게 망가진 몸을 가지게 된 이상 어떻게 신체라는 걸 긍정할 수 있겠는가.
얼른 이 번거로운 육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은 완전히 혼이 정착된 게 아니니,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육체도,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겠지.
“아후후. 자기. 여기 있었어?”
그래. 바로 지금 제가 다가오는 그녀에게로 말이다.
거미 도넛을 포장하고 있던 프시케는 소리도 없이 제 뒤로 다가온 머펫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상냥한 건지 무서운 건지 구분되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는 상대방의 손에는 상품이 가득 든 바구니가 있다. 아마도 자신을 부른 이유는, 저걸 배달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겠지.
“어디로 가면 돼?”
“스노우딘이야. 이젠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다 아네?”
“너랑 함께 한 지 꽤 오래 되었으니까, 눈치가 빨라진 거겠지.”
“아후후후.”
높은 톤으로 소리 내 웃은 머펫은 상냥한 손짓으로 바구니를 넘겨주었다.
“다녀오면 저녁을 먹자. 자기가 좋아하는 걸 준비해 둘게.”
“응. 다녀올게.”
어차피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그녀가 준비해 줄 수 없고, 준비해 준다 해도 지금의 자신은 먹을 수 없다. 아아, 이러다간 유령 샌드위치의 맛도 잊어버리게 되는 게 아닐까. 냅스타블룩과 함께 먹었던 샌드위치의 맛을 억지로 기억해내려 노력하며, 프시케는 성큼성큼 핫랜드 바깥으로 향했다.
02.
아후후후.
얘들아 이것 봐. 어제 거미줄에 걸린 재료에 이상한 게 들어갔어.
유령? 네가? 갑자기 이 나비괴물 몸 안에 빨려 들어갔다고?
아후후후.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지만, 곤란한걸. 이건 우리 재료였는데. 이래서야 멀쩡한 식재료를 낭비한 꼴이 되었잖아. 그 몸에서 나올 때 까지 나와 함께 있어줘야겠어.
싫으면, 통째로 잡아먹지 뭐. 아후후후.
그래. 잘 생각 했어. 현명한걸, 자기.
나는 머펫이라고 해. 여기 있는 거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도넛과 사이다를 팔고 있단다.
자기는 이름이 뭐야?
프시케?
마음에 드는 이름인걸! 아후후. 그럼, 잘 부탁해. 자기.
부디 우리의 식재료가 다 떨어지기 전 그 몸에서 빠져나올 수 있길 빌게.
03.
잠깐 심부름을 갔다 온 사이, 동굴 안이 소란스러워 졌다. 프시케는 굴 입구에 서서 어둠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도 누군가가 머펫의 초대를 받고 왔다가 거미줄에 얽혀 발버둥 치고 있는 거겠지. 누군지는 몰라도, 참으로 불쌍한 괴물이다. 거미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 과연 지갑 안은 두둑하게 채워 왔을까.
“아악!”
익숙한 단말마 뒤로, 수많은 다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뒤따른다. 아아. 결국 지불하지 못한 걸까. 프시케는 차가운 제 몸체에 슬며시 손을 얹어보았다.
아마 이 몸의 주인도 머펫에게 적당한 비용을 지불하지 못했기에 거미줄에 매달려 죽어가야 했던 거겠지. 비록 자신은 생(生)을 바라는 몸에 이끌려 강제로 빙의된 유령일 뿐이지만, 그 때의 공포에 대해선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몸에 남아있는 강한 의지들이, 언제나 제게 원래 주인이었던 영혼이 느꼈던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무서워. 무서워.
살려줘, 제발. 돈은 없지만.
아파. 아파. 날개가, 다리가.
그렇게 노래 부르며 춤추지 마.
제발.
몸이 기억하고 있는 공포는 낯선 영혼인 자신조차도 두렵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아직까지도 머펫과 눈이 마주칠 때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날카롭고 깊은 공포감이었지.
하지만 그것도 이젠 제법 무뎌졌다. 예전엔 거미도넛도 못 만질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는데, 지금은 거미줄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거미들이 익숙해졌으니까. 이건 어쩌면 제 영혼이 몸과 점점 분리되고 있는 징조일지도 몰랐지만, 반대로 이 몸에 익숙해 져 옛날에 머물렀던 영혼의 감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면, 남는 건 허무한 기다림 뿐.
“자기, 왔어?”
“응.”
어차피 제가 결정할 수 없는 미래고, 사라져가는 두려움이라면. 이 살벌한 동거인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 제게 이득 아닐까. 물론 굳이 이득이 아니라고 해도 프시케는 머펫을 싫어하지 않았다. 조금 오싹한 소릴 할 때가 있어서 그렇지, 머펫은 자신의 사람에겐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괴물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녀왔어, 머펫.”
아후후후. 빈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인사하는 프시케를 보며, 머펫은 오늘의 사냥감을 오븐에 던져 넣었다.
04.
머펫이 당신을 초대한다면 핑계를 대서 거절해라.
특히, 상처투성이인 나비괴물과 함께 있을 때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