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
제시카 존스
제시카나리
There’s something in the wind
바람 속에 무언가가 있어요
I can feel it blowing in
난 그것이 불어오는 걸 느낄 수 있죠
It’s coming in softly
아주 부드럽게 다가오고 있어요
On the wings of a bomb
폭탄을 숨긴 날갯짓을 타고
There’s something in the wind
저 바람 속에 무언가가
I can feel it blowing in
불어오고 있단 걸 난 느낄 수 있어요
제시카 존스는 내가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사실 그 말은 내가 본 모든 것 중에 그녀만큼 비참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단 뜻이다. 길거리에서 주운 마약봉지처럼, 마치 운명이나 저주처럼 피해야 하지만 피할 수 없이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맨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골목 깊숙한 안쪽에서 쥐들이 파먹은 설탕꾸러미처럼 검게 파헤쳐진 쓰레기 봉지들 위에 악취를 풍기며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고대가 몰락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여신 역시 이교도의 악신으로 몰려 추방당한 흔적 같았다. 그 종교적 잔인함은 더 이상 나를 놀라게 하지 못했지만 그 무심함만은 여전히 나를 소름끼치게 했다. 한때 아름다웠던 것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썩어간다는 것이, 그 무심한 부식이 내 몸에 닿기도 한듯이.
빗물에 젖은 골목은 푸르스름한 가스등이 타오르듯이 파란 조명만 어렴풋하게 그림자들을 비췄다. 방범용 창살과 칠이 벗겨진 낡은 콘크리트 건물, 낡은 거리엔 비추지 않는 게 나을 법한 쓰레기와 오물들이 나부꼈다. 고양이조차 나오지 않는 밤이었다. 새벽 즈음. 사람들은 죄다 잠들었거나 다른 일로 바쁜 시간.
그 무렵 나는 유학생이 지니고 있던 일말의 환상이나 무기력감을 딛고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뉴욕의 온갖 모습을 담아내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영화와 소설로 접하던 메트로폴리탄 이미지를 벗겨 뉴욕이라는 거대한 민낯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나 스스로 내가 원하는 환상에서 벗어남으로써 한 차례 성숙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더 이상 순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움직였다.
더구나 그때 나는 모퉁이 너머로 이어지는 다른 길거리에서 폭행당할 뻔하던 사람을 구해주고 묘하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던 참이었다. 나조차 뭔지도 모를 내 힘을 사용하여 도와주고 누군가의 감사 인사를 받는 것도 몇 주째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구하고 나면 기분이 떨렸다. 두렵고 기뻤다. 그 흥분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녀를 만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술에 취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영웅심에 취한 어린 자경단원…….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때 제시카였고, 지금은 그녀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의 인간.
아무튼 처음에 나는 그녀가 여자인지도 몰랐다. 단순히 아주 깡마른 남자가 골목에서 쓰러져 있는 줄 알고 도와주러 온 것뿐이었다. 취한 남자 정도야 쉽게 둘러메면 되니까. 술냄새가 워낙 지독해서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서도 그가 얼마나 많은 양의 술을 위속에 들이부었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거의 옷을 알코올에 몸을 담근 수준이었다. 술 냄새가 쉬어빠진 망고 냄새와 비슷했다. 조금 더 알싸하고 독한 화학적 풍미가 가미되었지만 시큼하고 톡 쏘는 향기. 비가 와서 술 냄새도 쉽게 희석되었다. 그 희미하게 톡 쏘는 향기만 코밑에서 감돌았다. 악취를 참으며 가만히 쳐다보니, 처음의 짐작과 달리 인영은 남자보다 훨씬 연약하고 섬세한 선으로 돋보였다. 나는 악몽의 정체를 짐작하려고 애쓰듯이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가 보았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여자였다.
그녀는 모델처럼 호리호리하고 길쭉했다. 얼굴은 옆으로 돌아가 검은 비닐에 파묻은 채,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는 청바지에 감싸여 헌옷이 담긴 듯한 봉지 위에 걸쳐져 있었다. 내가 남자로 착각한 것도 그녀가 꽤 키가 컸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아니란 걸 알자 나는 내가 역으로 위협 받을 위험이 줄어든 데다, 술 취한 여자를 뒷골목에 두고 가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도 없다는 생각에 한결 기꺼워진 마음으로 그녀를 반드시 도와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먼저 그녀를 여기서 옮겨야 했다. 나는 아예 그녀가 매트리스로 사용하고 있는 봉지들을 치우며 길을 만들었다. 비닐 위에 고인 물이 튀어서 옷이 젖어들어가고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한층 크게 골목을 울렸다. 우산을 든 한쪽 손을 못 움직이는 바람에 나는 몇번 미끄러져서 나직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기우뚱거리는 상체의 균형을 잡느라 허둥댔다. 간신히 그녀를 받친 비닐 뭉치들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가린 봉지를 치워냈다.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잡아 고개를 돌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원래 수전증이 있었으므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내 손끝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이 성전을 쓰다듬을 때처럼…… 혹은 신부가 죄를 만질 때처럼 떨리며 이 상황의 비현실성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골목의 있으나마나한 희미한 불빛을 받아 은빛 물고기처럼 빛나는 하얀 피부에 입술은 두꺼웠고 찡그린 눈썹도 짙었다.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강렬한 생김새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젖어 있었다. 가냘픈 선이 일그러진 채 벌어진 입술로 불규칙한 숨소리가 쌕쌕거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려두었던 비닐을 힘없이 놓아버렸다. 비에 젖은 손이 시려서 덜덜 떨렸다. 어두워서 그녀가 우는 것도 같았다. 빗물은 위장이었다. 파란 흑발이 젖은 얼굴에 슬픔처럼 달라붙어 그녀는 폭풍이 지나 난파된 나무 파편과 자갈 더미 위에서 소리 없이 허덕이는 물고기 같았다. 고요하고 처참해서, 그대로 두었다간 썩어서 사라질 듯했다. 이름도 모르는 밤의 여신처럼 완전히 잊힐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조용히. 죽은 것 가운데 유일하게 죽지 못한 생명은 원죄가 되고 마는데도. 나는 눈을 깜박였다. 칼날이 눈과 가슴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나는 그처럼 추하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것이 내 행운이자 불행이었음을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이제까지 나는 몰랐었다. 앞으로도 모를 수만 있었다면.
우산을 들고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마치 무슨 짓을 해야 할지 몰라 횃불을 들고 오래도록 시체를 내려다보는 납골당지기라도 된 양. 우산을 잡은 손이 차가워져서 다른 손으로 바꿔들기까지 나는 그녀 위로 우산을 씌워준 채 비를 맞고만 있었다. 문득,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냥 그녀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보다 문득 입을 맞춰버리고 마는 자신을 발견하듯이. 하지만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는 못했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폭우 대신 가는 빗줄기가 계속되었다. 웅덩이에 고인 물 위로 퍼지는 작은 파문들과 가끔씩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비가 멈추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코를 훌쩍거렸다. 10월이었고 날씨는 많이 추워졌다. 하긴 다음 계절은 겨울이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는 그대로 폐렴에 걸릴 때까지-이미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비를 맞거나 다른 질 나쁜 놈들에게 당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이런 적이 많았다. 남들은 그냥 쉽게 지나치는 일들을 이상하게 나는 지나치지도 못한 채 걱정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하다가 결국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방치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는 잘 몰랐다. 이제까지 나는 내 마음에 드는 물건들은 서랍 속에 숨겨두거나 일부러 망가트리고 울어버렸다. 사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된단 것쯤은 이제 알았다.
원래 나는 충동에 휩쓸리기 전까진 자주 머뭇거렸다. 지금 나는 이미 한 가지 충동-그녀를 가만히 구경하는 것-을 저지르고 있었고 두 번째 충동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녀를 내 방으로 데려가도 좋을지 아니면 얌전히 경찰에 연락해 이것저것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각오를 해야 할지. 어느 쪽도 마음에 드는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귀찮은 일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망설이는 것은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나는 두려운 것 같았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몰랐다. 추워서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낯빛이 나빴지만 마약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정말 술에만 취한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마약에 취한 상태라면 나까지 곤란해질 게 뻔했다. 나는 엄연히 외국인이었고, 유학생 신분이란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은 법이었다. 자칫하단 교환학생 기간도 못 채우고 추방당하는 수도 있었다. 이미 난 영웅놀이를 한답시고 너무 많은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었다. 마약 중독자를 구별하는 법 정도는 익혀둘걸. 나는 짧게 후회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매뉴얼이 있다면 편할 텐데. 물론 난 그 매뉴얼조차 제대로 외우거나 실행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정확한 지시가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지금 나에게는 가장 간절하게 이정표가 필요했다. 차라리 그녀가 일어나서 꺼지라고 한다면…….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해야만 일 또한.
“저기요.”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얹은 순간 그녀가 낮게 신음했다. 나는 얼른 손을 떼고 그녀에게 상체를 숙였고 그녀가 뭐라고 말할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새삼 우산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너무나 거세게 들렸다.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은데, 구부정한 영어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국어라도 알아듣기 힘든 주정을 외국어로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흐린 정신이 이 상황을 어떻게 기억할지 걱정되었다. 잠시 뭐라고 욕설을 뱉는 것도 같더니, 그녀는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놀랄 정도로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뭐야.”
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빗물을 삼키고 말았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이미 다 젖은 주제에 나는 여전히 우산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젖었어도 비를 맞는 건 다른 문제였다. 가령 폐렴에 걸릴 확률이라든가……. 불빛과 빗줄기 모두를 막으며 우산은 그녀와 나 위에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우산에 부딪치는 빗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나는 망설이다 우산을 땅에 내려놓았다. 빗방울은 제일 먼저 속눈썹을 적셨다. 빗물이 들어 차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묽게 번졌다. 물속처럼 그녀가 눈속에 꽉 찼다. 빗물 때문에 우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나는 조금 울고 싶기도 했다. 아. 그래도 비가 와서 다행인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바보 같이.
“정나리요. 정나리…… 당신은요?”
그녀의 젖은 입술에서 짜증스러운 숨이 샜다. 우산을 내려두어서 다행이었다. 우산 속에 있었다면 듣지 못할 소리였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은 채, 두 번 다시 말해주진 않을 거라는 듯이 몹시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존스. 제시카 존스.”
나는 그 이름을 천천히 발음해보았다. 사랑에 빠진 그림을 막아둔 유리벽에 입 맞추듯이.
“제시카…….”
빗줄기가 부드럽게 뺨을 적셨다. 나는 눈물을 닦아내듯이 눈가를 닦았다. 울고 있었던 것도 같다. 왜인지는 영원히 모를 것만 같다. 겨울 직전의 가을이었다. 비와 밤, 거리와 골목, 쓰레기와 오물. 이것이 내가 제시카 존스를 만나 첫눈에 반한 어느 날 밤의 이야기다. 제시카 존스는 내가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그 말은 내가 본 모든 것 중에 그녀만큼 비참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단 뜻이다. 마치 운명이나 저주처럼, 길거리에서 주운 마약봉지처럼 피해야 하지만 피할 수 없이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그녀를 아주 많이, 너무나 많이 사랑하게 된 이야기의 첫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