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이
미션 임파서블
일사베이비
일사. 이 사랑은 영원할 거야. 맹세해.
일사 파우스트. 나는 그 이름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게 단단한 목줄을 채웠던 애틀리가 그 이름을 읊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 주인을 함부로 물어뜯지 않는 사람, 적당한 협박으로 짓눌러 이리저리 휘두르기 좋은 사람. 애틀리가 묘사하는 일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직접 일사와 만나본 적이 없으니 자연스레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간 것은 싸늘한 선입견뿐이었다. 다른 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일사의 모습은 내가 만든 환상이었으나 나는 구태여 그녀의 진실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일사를 차갑게 비웃으며 나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지는 않으리라고 위안을 삼곤 했다. 그러는 동안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고 내 억양도 점차 런던 거주자에 가까워지기 시작했으나 그때까지도 내가 일사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름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저주받은 그림자처럼 끝없이.
그 이름에 익숙해지기 시작할 무렵, 어느 늦은 겨울에 나는 무리를 잃은 사슴처럼 눈밭을 헤매다가 발을 헛디뎌 가파른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시린 추위가 살점을 베어 내고 찢어진 복부에서 뜨거운 것들이 새어나오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청소부에게 임무 실패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애틀리에게 묶인 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새하얀 불빛 같은 눈이 내 몸뚱이 위로 잔인하게 쏟아지자 의식이 점차 점멸해갔다. 나는 멸망한 도시처럼 잊혀질 것이다. 누구도 나를 찾아내지 못하고 외로이 비석 하나 없는 무덤을 만들게 될 것이다. 멍청한 계집애. 나는 스스로를 비난하며 곧 다가올 죽음을 맞이하려 눈을 감았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 여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를 구했다. 내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누구야? 내가 묻자 여자가 대답했다. 일사 파우스트.
일사. 일사 파우스트. 나는 입술을 열고 그녀를 차분하게 불렀다. 그 단어가 아름다운 선율처럼 흐르기 시작하자 내 혀끝에서는 단맛이 퍼져나갔다. 어찌나 달콤하고 아늑했던지! 그녀의 이름은 사악한 뱀의 사과처럼 내게는 몹시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 순간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 내게 떨어졌음을. 그녀가 내 최초이자 마지막 사슬이 됐던 것과, 서투르고 서러운 욕망에 젖은 내가 밤새도록 그녀를 그리워하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조차도. 내 사랑. 당신은 평생을 가도 날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내가 운명을 거스르도록 만들고, 피가 뚝뚝 흐르는 내장을 쏟아내면서까지 뒤틀린 애정을 끄집어내게 만들었던 유일하고 애틋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나의…….
아, 나의 사랑하는 심판자…….
“안녕, 일사.”
나는 벌건 선혈이 흐르는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웃었다.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내 말에 일사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불에 그을려 더욱 선명해진 분노의 냄새가 가감 없이 내게 닿았으나 나는 그것마저도 좋아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애처롭게 아름답고 처연했다.
“너도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 이제 알겠다. 너 날 죽이려고 왔구나.”
“…….”
“하하하……. 이 끔찍한 지옥에서 날 구원해주려고? 기쁘다.”
“입 닥쳐.”
일사는 이를 악 물고 내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가시를 잔뜩 세운 그녀의 눈은 비극 속의 여인처럼 아프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가여워서 당장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차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철근이 씹어 삼킨 다리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일사. 날 죽이고 싶다면 어서 죽여. 어차피 난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해.”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일사의 입가가 떨렸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씹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느릿한 발걸음은 다정한 속삭임 같았다.
일사는 한참동안이나 나를 살펴봤다. 내 망가진 다리를 지나 부러진 팔, 찢어진 어깨를 거치던 시선은 유일하게 멀쩡한 내 얼굴로 향했다. 그녀의 눈은 햇빛처럼 따뜻해서 그녀의 시선이 닿은 자리마다 꽃이 피는 것 같았다. 그게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느릿하게 호흡했다.
“형편없는 꼴이지?”
“그래. 아주 엉망이야.”
“가능하면 너에겐 근사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어. 어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 같아?”
“전혀.”
“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왼쪽 다리는 이제 감각이 전혀 없었다. 이제 이 악몽은 점차 온몸으로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내게는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일사도 그걸 알았다. 나는 찢어진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려 안간힘을 썼다. 완전히 침몰해서 바닥에 가라앉기 전에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일사. 나는 그녀의 이름을 마지막 희망처럼 되새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널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난 그러려던 게 아니야. 결코 네게 상처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넌 MI6를 떠나 신디케이트에 가담했지. 이후엔 아포슬에 합류했고. 이건 명백한 반역행위고 넌 일개 반역자일 뿐이야.”
“넌 배신감에 치를 떨며 내게 겨냥한 분노를 수백 번 곱씹느라 바빴잖아. 내게 어떠한 선택지도 남지 않았다는 걸 넌 미처 보지 못했던 거야.”
“헛소리는 그만 둬.”
“일사. 난 그저……이 미친 짓거리에 질릴 대로 질렸던 것뿐이야.”
내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빠져갔다. 나는 더 이상 목표물을 사납게 물어뜯는 맹견이 아니었다. 나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점차 바스러져가는 유약한 겁쟁이였고, 참혹한 조소가 두려워 몸을 웅크린 채 혼자 흐느끼는 어리석은 필멸자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일사, 나한테는 국가도 정부도 임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내가 애틀리 밑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도 가능한 오래 살아남기 위함이었지 특별한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었어. 그런 얄팍한 것들은 내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해.”
“…….”
“나를 멍청한 계집애라고 생각하지? 그 말이 맞아. 난 정말 멍청해. 하지만 내 말에는 거짓이 없어. IMF도 MI6도 신디케이트도 아포슬도 나한테는 다 똑같아. 파멸만이 남은 굴레고 벗어날 수 없는 나락이야.”
“…….”
“나는 이제 그런 것들에는 진저리가 나. 나는 너무 지쳤어.”
기어코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새어나오는 흐느낌을 애써 삼켜내고 기침을 토했다. 내 가슴을 아프게 들쑤시는 불행은 내가 지니고 있던 죄악감처럼 소리 없이 흘렀다. 나는 일사를 쳐다보는 것조차 버거워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가 날 싫어하는 거 알아.”
나는 처참한 절망을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아주 먼 옛날에는, 꿈처럼 번지던 찰나에는- 네가 날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해주지 않았을까? 내 온기가 네 뺨을 쓰다듬었을 때 네 가슴에서 별이 반짝이지는 않았을까? 내 이름이 네 입술에서 유언처럼 터져 나온 적은 없었을까? 나는 간헐적으로 숨을 뱉으며 간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때 너랑 같이 떠날 걸 그랬어.”
“…….”
“우린 누구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그때 떠나기만 하면 됐었는데. 다 잊어버리고,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그냥 너랑 함께 그림자 뒤에 숨어버릴 걸.”
“……베이비.”
“아, 드디어 네가 날 이름으로 불러주는 구나.”
나는 진심으로 기뻐서 웃었다. 그녀의 곁을 떠난 뒤 한 번도 불러준 적 없었던 이름이었다.
“정말 우스운 이름이지……. 하지만 내가 그 이름을 고른 건 잘한 짓이었어. 그건 오로지 널 위한 이름이었거든. 네가, 나를, 날 그렇게……그렇게 달콤하게 불러주니까, 네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
“나는 수많은 이름과 신분을 가진 채 살아왔어. 나는 어느 봄에는 프랑스 부부에게 입양된 마리안느였고 어느 가을에는 미국의 고아원에서 자란 조이였어. 내게 진실이란 없었어. 하지만 네가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순간만큼은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지.”
“…….”
“내 세상을 창조한 건 너야. 내 삶은 너 하나만을 위해 빛나고 있었던 거야. 내게 시작과 끝과 의미를 가져다준 건 너였어. 처음부터 그랬어.”
총을 쥔 일사의 손이 울음처럼 떨린다. 너 지금 울고 있구나. 그러지 마. 나 때문에 울지 마. 아프다. 여기가 너무 아파. 숨을 못 쉬겠어. 아, 나의 일사. 내가 사랑하는 일사. 나만의 일사. 내 이기적인 두려움이 너를 이렇게 흔들리게 만들었구나. 나는 침을 삼켰다.
“괜찮아. 괜찮아, 일사.”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을 약속하며 속삭였다.
“방아쇠를 당기면 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어. 넌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넌……정말 비열하고 멍청한 계집애야.”
“네 말이 맞아.”
“난 아직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몰라도 괜찮아.”
“난 네 이름조차도 몰라…….”
“마지막이니까. 내 진짜 이름을 알려줄게.”
나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멀리서 하얀 불빛이 보이는 것 같다. 차가운 눈발이 날리던 그때처럼. 그리고 일사는 나를 보고 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그녀의 예쁜 입술 사이로는 아픈 재앙이 퍼져 나온다.
그때도 지금도 내 곁에는 네가 있구나. 넌 항상 날 구원하고 있었구나. 그래, 너는, 너는 날 아주 조금은 좋아하고 있었던 거구나. 넌 아주 가끔은 날 떠올리고 그보다 더 가끔은 나의 습관을 더듬으며 아침을 맞이하겠구나.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끝내야 해.
“일사.”
나는 입술을 핥고 그 겨울날의 밤처럼 울었다.
“내 이름은…….”
그 직후.
무겁고 서늘한 소리가 비명처럼 내 머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녀의 총알은 마침내 나의 마지막 호흡을 앗아간 것이다.
핏방울이 서글프게 번지고 내 고개가 힘없이 꺾인다. 점차 축축한 것들이 내 몸을 적시기 시작한다.
곧이어 어둠이 사방에서 찾아와 내 시야를 가렸으나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일사.
나는 소리 없이 그녀의 이름을 읊는다.
여전히 아름다운 단어였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스러울 그 이름이…….
나의 일사.
널 영원토록 사랑해.